구체제의 모순
혁명 이전 프랑스 사회는 구체제의 모순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1 신분인 성직자와 제2 신분인 귀족이 관직과 토지를 독점하고 면세 특권을 누렸던 반면 제3 신분인 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내면서 정치적 권리를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제3신분 가운데 상공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부르주아지)은 계몽사상과 미국 혁명의 영향을 받아 구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부터 오랜 전쟁과 재정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여기에 루이 15세 때 치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으로 국가 재정은 흔들렸고, 미국 혁명을 지원하여 거액의 부채가 생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연이은 흉년으로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빵값이 크게 올라 사회적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75년 동안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삼신분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이때 삼부회(삼신분회)에 모인 신분별 대표들은 투표 방식을 놓고 대립하였습니다. 제3 신분의 대표 수가 제1, 제2 신분의 대표 수보다 많았기 때문에 제3 신분 대표들은 신분별 투표를 반대하고, 개인별 투표를 주장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전개
제3 신분 대표들은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발표하고 국민 의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중과 국왕 수비대가 충돌하여 희생자가 나왔고, 파리의 민중이 전제 정치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1789)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후 혁명은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농민들은 귀족을 공격하였습니다.
국민 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기본 이념을 천명하였습니다. 이어 국민 의회는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길드를 폐지하였습니다. 또한, 입헌 군주제, 권력 분립, 제한 선거 등을 담은 헌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헌법에 따라 입법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위협을 느끼고 프랑스를 압박하였습니다. 왕정과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의 물결이 자국에도 밀어닥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롱드파가 장악한 입법 의회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혁명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프랑스 혁명군은 패전을 거듭하였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연합군은 국경을 넘어 파리를 향해 진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오히려 프랑스인들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였습니다. 농민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의용군으로 참전하였고,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연합군을 막아 냈습니다. 이 무렵 파리의 민중(상퀼로트)은 왕궁을 습격하여 루이 16세를 체포하였고, 국민 공회가 들어섰습니다.
혁명의 과격화
국민 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였습니다. 다음 해에는 국민 공회 내 급진파인 자코뱅파의 주도로 루이 16세를 처형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는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해 왔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국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민 공회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자코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는 공안 위원회와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여 지롱드파, 왕비와 왕족, 충성을 거부한 성직자들을 잇달아 처형하였습니다. 동시에 민심을 얻기 위해 봉건적 공납을 폐지하고 국가와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분배하였으며, 물가 안정을 위하여 최고 가격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징병제를 실시하여 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공포 정치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국민 공회 내 온건파는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여 처형하였고, 그가 실시했던 정책들을 폐기하였습니다(테르미도르의 반동, 1794).
혁명의 종결
공포 정치가 끝난 뒤 민중을 배제한 제한 선거로 양원제 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재를 막기 위해 5명으로 이루어진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총재 정부는 부르주아지 세력을 기반으로 세워진 집단 지도 체제였습니다.
총재 정부는 왕당파, 급진파의 공격과 경제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여기에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대외 상황도 불리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총재 정부는 군부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군부가 정치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혁명의 오랜 혼란 속에서 안정과 질서를 바라고 있던 여론도 군부의 등장에 호의적이었습니다. 결국, 총재 정부는 군부의 실력자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무너졌습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의의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형제애)의 이념 아래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구체제를 타파하여 시민 사회와 자본주의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17, 18세기의 모든 혁명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고 급진적이었으며, 보편적이고도 세계사적인 혁명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념은 이후의 민주주의의 전개에서 중요한 이념과 행동 목표를 제공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18세기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기에 봉건적, 미신적, 비합리적인 요소들과 잘못된 구습들을 바로잡고 인류 역사의 진보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인간성을 해방하고 개인의 양심과 신앙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혁명의 과정 속에서 신분제적 특권은 폐지되어 갔으며, 농민들은 십일세와 봉건적 부조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사생활 면에서 남녀의 자유로운 이혼의 권리가 부여되었으며,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해외 식민지에서 노예 해방도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은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무너졌지만 혁명의 중요한 업적들은 유지, 계승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혁명을 통해 봉건적 특권 계급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었으며,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민주주의 사회 형성의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조화롭게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공포 정치가 잘보여 주듯이, 혁명가들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고,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시민이 부르주아 계층이었기 때문에 민중의 대부분을 이루는 농민과 노동자층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한계점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집권과 몰락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 정부를 세웠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내정 개혁을 단행하여 구각 재정을 정비하고,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였으며, 국민 교육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또한, 나폴레옹 법전으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법제화하였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신분 상승이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으로 나폴레옹은 프랑스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국민 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징병제에 의한 국민군과 근대적 포병 전술을 앞세워 유럽을 정복해 갔습니다. 1805년 영국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자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상륙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패해 실패하였습니다. 영국 정복에는 실패했으나 육지에서의 연이은 승리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을 물리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여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발표하였습니다(1806). 그러나 러시아가 영국과 교역을 계속하자 러시아 원정에 나섰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의 후퇴 전술에 말려들었고, 겨울 추위가 밀려오자 퇴각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자 대 프랑스 동맹군은 프랑스를 공격해 왔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동맹군에 패배하여 몰락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를 유럽 세계에 전파하였고,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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