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혁명과 공화정 수립
16~17세기 전반 영국 농촌에서는 장원제가 무너지면서 요먼과 젠트리가 나타났습니다. 특히, 헨리 8세가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하여 매각하면서 젠트리가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도시에서 상공업으로 성장한 시민 계급과 함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젠트리는 농촌 사회의 행정을 맡았고, 의회에 진출하여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젠트리와 시민 계급은 대부분 청교도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의회를 무시하고 전제 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국교회를 고수하면서 청교도를 탄압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청교도를 박해하였을 뿐 아니라 프랑스, 에스파냐와의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매겼습니다. 이에 의회가 권리 청원을 제출하였고, 찰스 1세는 이를 승인하였으나 곧 의회를 해산하였습니다.
11년 뒤 찰스 1세는 의회를 다시 소집하였습니다. 그의 종교 정책에 반발한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사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소집된 의회가 세금 징수를 반대하고 국왕의 실정을 비판하면서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의회파의 중심 세력은 젠트리와 시민이었습니다. 결국, 젠트리 출신 크롬웰의 활약으로 의회파가 승리하여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였습니다(청교도 혁명).
의회파의 지도자 크롬웰은 왕당파의 거점이었던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항해법을 제정하여 경쟁국인 네덜란드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항해법으로 영국의 대외 무역은 더욱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호국경에 올라 청교도주의에 입각한 독재 정치를 실시해 국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찰스 2세가 즉위하여 왕정이 부활하였습니다.
명예혁명과 의회 정치의 정착
찰스 2세는 친가톨릭적 전제 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이에 의회는 심사법과 인신 보호법을 제정하여 맞섰습니다. 당시 의회에서는 국왕을 지지하는 토리당과 의회를 지지하는 휘그당이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전제 정치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그는 심사법을 무시하며 가톨릭을 재건하려 하였고, 반대 세력을 불법으로 체포하였습니다. 이에 의회는 제임스 2세를 내쫓고, 그의 딸이자 신교도인 메리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메리, 윌리엄 부부의 군대가 네덜란드에서 들어오자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습니다(명예혁명). 왕위에 오른 메리, 윌리엄 부부는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권리 장전을 승인하였습니다.
이 무렵 영국의 국력은 꾸준히 성장하였습니다. 앤 여왕 때에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였습니다.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독일 하노버가의 조지 1세가 즉위하였습니다. 독일에서 살던 조지 1세는 영어를 몰랐고, 영국의 사정에 어두워 국정에 참여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의회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고, 다수당에서 장관을 뽑아 국정을 운영하는 내각 책임제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영국 정치에서는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의회 정치에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일정한 재산을 가진 자로 제한되어 대부분의 농민과 도시 서민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여성도 선거권이 없었습니다.
미국 혁명의 배경
17세기 이래 영국인들은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 이익을 찾아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결과 18세기 초에는 북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영국은 각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였으나 특별한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식민지마다 의회가 구성되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 무렵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사회 계약설 등의 진보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7년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자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중상주의적 통제 정책을 실시하여 인지세, 설탕세, 차세 등 각종 세금을 매겼습니다.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도 없다."라고 주장하며 반발하였습니다.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결국, 영국은 차세를 제외한 모든 세금을 폐지하였지만 식민지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바다에 던져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보스턴 차 사건). 이에 영국이 보스턴항을 봉쇄하여 식민지를 압박하자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최초의 민주 공화국 수립
1774년 북아메리카 식민지 대표들은 제1차 대륙 회의를 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들 중 다수를 이루는 온건파는 독립을 선언하는 대신 영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영국과의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워싱턴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발표된 독립 선언서에는 자연권, 주권 재민, 저항권 등 근대적 사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독립 전쟁 초기에 식민지군은 영국군에 밀렸으나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의 도움을 받아 전세를 역전해 나갔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7년 전쟁 때 영국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식민지군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여기에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 노예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결국, 식민지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을 크게 물리치고 파리 조약에서 독립을 승인받았습니다.
독립 전쟁 이후 13개 주에서는 대외 교역이 침체하고 물가가 폭등하였습니다. 사회 불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통합이 필요해진 13개 주는 연방 헌법을 제정하여 삼권 분립에 바탕을 둔 민주 공화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으로 워싱턴을 선출하였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메리카 합중국은 각 주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연방 정부가 군사권과 외교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미국 혁명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에 독립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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