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혁명의 토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자연 과학은 이슬람 세계의 과학을 수용하며 꾸준히 발달하였습니다. 망원경, 현미경, 온도계 등이 발명되고, 경험론과 합리론이 진리 탐구의 바탕이 되면서 과학적 실험과 합리적 추론에 의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은 인쇄술의 발달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17세기에는 천문학과 물리학은 물론 화학, 의학, 광학과 같은 분야에서도 새로운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과학 혁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바탕이 된 것은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출현이었습니다. 즉,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이었습니다.
베이컨은 개별적 사실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렇게 관찰한 지식을 축적한 뒤 그 사실들을 연결시키는 법칙을 찾았습니다. 이것을 귀납법이라고 하며, 영국의 경험론적 철학 전통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한편, 데카르트는 먼저 대전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분석하면서 개별적 사실에 관한 결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을 연역법이라고 하며, 유럽 대륙의 합리론적 철학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방법은 출발점은 다르지만 근대의 새로운 과학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그들은 형식 논리에 빠진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거부하고, 과학이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유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과학 혁명의 다양성
17세기의 과학 혁명은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시킨 자연 과학의 지식과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진 관찰 정신이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인도, 페르시아의 학문까지 연구, 보존하였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아랍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지식인을 우대하여 천문학, 수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에스파냐에 진출해 있던 이슬람 지식인들을 통해 중세 말기부터 그들의 학문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는데, 그것이 과학 혁명의 한 기틀이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새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비행기의 모형도를 그렸습니다. 그는 많은 발명품을 남긴 기술자이면서, 인체 해부도를 그려 의학의 발달에 기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려는 태도가 과학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존의 천동설을 뒤집는 지동설을 연구하였고, 케플러는 지동설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지지하며 태양, 달, 목성을 관측하는 한편, 낙하 실험으로 새로운 물리 법칙을 발견하였습니다. 뉴턴은 지구와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원인을 밝혀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즉,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만유인력의 법칙). 뉴턴은 모든 자연 현상을 필연적인 인과 법칙으로 설명함으로써 기계론적 세계관을 확립하였습니다.
의학, 생물학, 화학, 수학도 발전하였습니다. 베살리우스는 인체 해부학을 연구하였고, 훅은 인간의 세포를 발견하였으며, 하비는 혈액이 순환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보일은 실험적 방법을 도입하여 근대 화학의 토대를 닦았으며,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미적분학을 개척하였습니다.
계몽사상의 토대
17세기 이래 과학적 사고가 강조되고 시민 의식이 성장하면서 자연법에 바탕을 둔 사회 계약설이 등장하였습니다. 사회 계약설은 국가와 사회가 사회 구성원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고 보았습니다.
홉스(영국, 1588~1679)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가 없는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이 자신의 관리를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유지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며, 국가 권력은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로크(영국, 1632~1704)는 자연 상태를 불편하지만 평화로운 상태로 보았고 절대 권력을 부정하였습니다. 즉, 개인은 생명, 재산, 자유 등의 자연권을 보호받기 위해 국가에 권리를 위탁하였을 뿐이므로 국가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시민이 그 권력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로크의 사회 계약설은 영국의 명예혁명을 정당화하였고 미국 혁명과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홉스와 로크가 사회 계약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본 것에 비해 루소는 개인이 일반 의지에 따를 것을 약속하는 것이 사회 계약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루소는 인민 주권을 강조하며 직접 민주주의를 옹호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계몽사상의 확산
18세기경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이 나타났습니다. 계몽사상은 과학 혁명과 사회 계약설, 합리론과 경험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낡은 관습과 미신을 타파하면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이성의 소유자인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였습니다.
볼테르는 희곡과 수필로 봉건 귀족을 풍자하여 시민 계급으로부터 인기를 얻었고, 언론과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낡은 질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상을 그려 냈습니다. 몽테스키외는 영국의 입헌 정치를 높이 평가하고,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을 역설하였습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여러 계몽사상가들과 함께 백과전서를 출판하였습니다. 백과전서는 당대의 과학, 기술, 철학 등을 집대성한 책으로,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데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한편, 루소는 계몽사상가이지만 이성과 진보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며 자연과 본성에 따르는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계몽사상은 권위의 원천을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찾으려 했고, 절대 왕정을 비판했기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계몽사상은 살롱, 카페 학회 등을 통해 퍼져 나갔고, 불합리한 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 분위기를 일으켜 시민 혁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서는 전제 군주들이 계몽사상을 받아들여 사회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전제 왕권을 유지하면서 국력의 향상을 꾀하는 것이어서 일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과학 혁명과 계몽사상의 성과
과학 혁명과 계몽사상은 중세와 대비되는 근대의 세계관이 대두되는 토양을 만들었습니다. 중세에 가장 지배적인 학문은 신학이었습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신앙의 신비를 찬양하고 성서와 교부 철학자들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의 과학 혁명을 겪으면서 자연 현상을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확산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신의 세계에 대한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 유용한 실제적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습니다.
대체적으로 과학 혁명은 자연 현상에 대한 지식의 확장에 기여하였습니다. 반면에, 계몽사상은 지식의 대상을 인간 사회로 넓혔습니다. 인간 사회에도 자연적인 질서가 있으며, 그것을 이해한다면 인간 사회에 퍼져 있는 무질서와 혼란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자연법 사상과 사회 계약설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각성시켰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념은 국민이 주체가 되는 근대 국민 국가 탄생의 전제가 되었습니다.
과학 혁명과 계몽사상의 한계
과학 혁명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여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시각은 베이컨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알면 그것을 정복할 힘을 얻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환경 문제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베이컨이 찬양했던 발명품인 화약이나 나침반 같은 과학 기술도 정복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화약으로 전쟁의 능력을 키우고 나침반으로 항해의 기술을 발전시킨 유럽은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여 제국주의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과학 혁명의 영향을 받은 계몽사상 역시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계몽사상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이성적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고 강조하지만, 그 이성의 핵심에는 유럽에서 배태된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크리스트교 신앙만을 강조하면서 유럽 이외의 지역을 포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그 예입니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된 노예 무역도 계몽사상의 인도주의가 갖는 유럽 중심적인 인종주의의 한 단면입니다. 인도주의를 내세우며 노예를 매매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한 것은 유색 인종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다수 계몽사상가들이 여성의 능력을 열등하게 본 것 또한 그들의 한계입니다. 또,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계몽주의는 인간의 감성을 경시하였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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