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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변화와 과도기적 현상

by mr.silly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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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공산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은 내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중국의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였고,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남부를 지배하였습니다. 당시 국민당 세력은 공산당의 3배가 넘었습니다.

 국민당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전쟁에 따른 기근과 물가 급등으로 생활이 어려웠으며, 부패했던 국민당 정권은 전쟁 자금을 미국에서 빌려온 대규모 차관에 의존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수적으로 열세에 있어 국민당 점령 지역을 피하며 농촌 지역에 병력을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토지 개혁과 사회 개혁을 통해 지지 계층을 확대하였습니다.

 1949년 1월 공산당과의 전투에서 패한 국민당의 사기는 크게 꺾였고, 트루먼 대통령은 장제스에 대한 지원을 끊었습니다. 국민당 정부는 인민 해방군이 난징에 입성하자 항복하였고, 마오쩌둥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1949. 10.). 그리고 기업의 국유화, 농업과 상공업의 집단화 추진 등 공산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한편,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국민당 망명자들과 중화민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중국의 변화

 1950년대에 들어 중국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먼저 토지 개혁과 주요 기업의 국영화, 그리고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농촌에서는 인민 공사를 조직하여 농가의 99%를 가입시켜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려 하였고, 공업의 발달을 통한 고도성장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저항과 자연재해 등으로 1961년에는 1년 만에 국민 총생산이 약 30%가 감소하며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 중국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반영한 정책이 효과를 거두면서 실용적인 수정주의 노선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정치적 위기라고 생각한 마오쩌둥은 대중에게 계급 투쟁을 호소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1966년에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문화 대혁명은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벌였던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내세우며, 자신을 추종하는 수백만 명의 학생들로 홍위병을 조직하였습니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명분으로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를 파괴하고, 반대파를 박해하여 많은 사람이 죽거나 상해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되었으며, 안팎의 갈등과 저항을 초래하여 중국 전체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0만 명의 공산당 간부가 자아비판을 강요받았습니다. 마오쩌둥이 죽은 후, 중국 공산당은 문화 대혁명이 잘못된 일이었음을 공식 인정하였습니다.

 

 패권 체제의 변화

 미국은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을 반공 기지로 만들기 위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경제 성장에 중점을 두었던 일본은 1950년대 중반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경제 수준으로 회복하였습니다. 

 일본은 1973년까지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루며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여기에는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특수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대규모 토목 공사의 부작용으로 부동산 및 물가가 폭등하였으며, 1,2차 석유 파동으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서독은 1949년 연방 공화국으로 새출발을 한 이후 기독교 민주당의 아데나워 정부가 추진한 경제 정책으로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서독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에 쉽게 편입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69년 사회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동독 및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정국의 안정과 경제 발전을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동서 교류의 확대

 1965년 이래 데탕트로 인한 동서 경제 교류는 급격히 확대되었습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치력 및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증강되자 서방 국가와의 정치적 대립을 완화하려 하였고, 이것이 동서 간의 경제 교류를 확대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장기간 소비 욕구를 충족하지 못했던 소비자들이 생활 수준의 향상을 요구하여 서방 국가로부터 수입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소련과 서방 국가와의 무역을 확대했던 또 다른 요인은 농업 문제입니다. 소련에서는 1960년대 이르러 식량 부족으로 정치적 위기를 자주 겪어 부족한 농산물을 매년 미구고가 캐나다 등 서방 국가로부터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소비재 공업과 농업 부문의 개발을 등한시했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해 서방 국가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는 등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서 간의 무역은 현저히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무분별한 기술 수용과 외국 자본의 도입은 차관을 증가시켰고 수입 주도의 경제 성장 정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후반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입과 1981년 12월 폴란드의 계엄령 선포로 동서 경제 교류는 급속히 냉각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초 불편했던 관계는 1985년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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