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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대두와 제2차 세계 대전

by mr.silly 202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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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발생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은 전쟁 중에 연합국을 상대로 하여 군수 물자를 판매하면서 축적한 부를 통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미국 경제는 호황 속에 이루어진 과잉 투자와 유럽의 불화잉 원인이 되어 악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 거래소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였고, 기업과 은행은 줄줄이 파산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자유방임주의 경제 원칙을 수정한 뉴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본국과 식민지를 하나로 묶어 경제적 블록권을 형성한 후 그 안에서 자급자족적 경제 구조를 만들어 공황을 극복하려 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은 대륙 침략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 하였고, 점차 군국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만주를 침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체주의의 대두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이었지만 원하던 영토를 얻지 못했고, 경제적인 이득도 크게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결성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군국주의를 내세우며 팽창 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며 막대한 배상금과 전후의 경제 사정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경제적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대공황이었습니다. 공황이 닥치면서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고, 국민들은 불안과 혼란 속에서 동요하였습니다. 이대 히틀러와 그가 이끌었던 나치당은 유대인을 배제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국가 사회주의를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여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대공황의 영향은 일본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일본에서는 대공황의 혼란과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위기감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군국주의가 대두하였습니다. 일본은 군국주의를 내세워 군비를 확장하고, 대외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들의 사상과 생활을 엄격히 통제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대외 침략을 본격화하였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 선택한 대륙 침략 노선은 대공황으로 입은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 나라 모두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식민지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전체주의를 내세워 국민들의 생활을 통제하였습니다. 특히, 독일은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다수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파시즘 체제로 무장했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두 나라는 에스파냐 내전을 지원하면서 베를린, 로마 추축을 결성하였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일본이 이에 가담하였습니다. 이로써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에 3국 군사 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세 나라가 파시즘을 기반으로 하여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들의 대외 침략은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체코의 수데텐 지방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자치 요구를 구실로 수데텐을 요구하면서 전쟁의 위기가 높아졌습니다. 이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뮌헨 히담(1938.9.)을 열고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ㅊ코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고, 폴란드의 단치히시와 회랑 지대를 요구하였습니다. 파시즘 세력의 확대를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독일은 영구고가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유화 정책을 이용하여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1939).

 

제2차 세계 대전의 전개

 침략을 시작한 독일은 신속하게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진격하고 프랑스를 침공하여 파리를 함락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드골은 영국에서 망명 정부를 세워 독일에 대한 저항(레지스탕스)을 선언하였습니다. 영국도 처칠을 중심으로 독일의 공습을 물리쳤습니다.

 1941년 독일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였습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북부 아프리카를 침공하였습니다.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원유와 자원 확보를 위해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시아로 침략하였습니다. 이에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는 일본의 전쟁 확대를 제재하기 위해 자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각종 원자재의 일본 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1941).

 전쟁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연합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 간의 싸움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전선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이르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전세는 1942년부터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몰락한 뒤 연합국에 항복하였고, 1944년에는 연합국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프랑스 파리를 회복하고 독일을 압박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연합군이 베를린에 진격하자,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만주로 공격해 오자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전개되는 중에 전후 처리에 관한 연합국의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전후 평화 수립의 원칙을 천명한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였습니다(1941. 8.). 그리고 카이로 회담(1943)에서는 미국, 영국, 중국이 참가하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와 한국의 독립 문제에 합의하였습니다.

 전재으이 종결을 앞둔 1945년에는 미국과 영국, 소련이 얄타 회담을 열어 전후 독일 처리 문제와 소련의 대일 참전을 결정하였습니다. 독일이 항복한 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참가한 포츠담 회담에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전후 독일은 열강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일본은 사실상 미군정의 지배를 받다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으로 주권을 되찾았습니다.

 60여 개국이 넘는 참전국들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였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능가하는 참혹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대량 폭격과 유대인 학살 등으로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200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전재잉 끝난 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전쟁 범죄자 처벌을 위한 군사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침략 전쟁을 범죄 행위로 간주하고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추궁하였습니다. 그 결과 독일 나치 당원들과 일본의 주요 전범들이 처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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