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체제의 성립과 문제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 방향을 논의하고 평화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에서는 기본 원칙으로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 평화안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전국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어 독일의 일부 영토와 해외 식민지를 빼앗고 영토 축소와 군비 감축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배상금을 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패전국과 개별적인 조약을 맺어 전후 처리를 마무리함으로써 베르사유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한편, 중국이 주장한 산둥반도의 권리 회복과 21개조 요구의 철폐를 열강이 거부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에 저항하는 5.4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 소식은 한구고가 베트남의 민족 운동 세력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국 1921년 미국이 주도한 워싱턴 회의에서 중국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열강 간의 이해관계가 조정되었습니다. 전후 평화 체제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였던 워싱턴 회의에서는 태평양과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질서와 군비 감축이 논의되었습니다.
평화를 위한 노력
제1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전 세계 국가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독일이 부담해야 할 막대한 배상금이었습니다.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부과된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프랑스는 루르 지방을 점령하였습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빠져 있던 독일 경제는 파탄 직전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독일 경제의 위기는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하면 미국에 대한 부채를 갚을 수 없었던 대다수 유럽 국가의 경제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미국이 중재에 나섰습니다.
미국은 1924년 도스안과 1929년 영안을 제시하여 독일에 대한 차관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독일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을 대폭 축소하고 지불 연한도 연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대공황이 발생하여 지불은 불가능해졌습니다. 1932년에 관련 국가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회의를 열어 배상금을 영안의 1/12인 30억 마르크로 대폭 인하하였으나 히틀러의 정권 장악 등으로 배상 문제는 흐지부지되었고 미국에 대한 전쟁 부채 문제도 사실상 소멸되었습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협상국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1920년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제창으로 설립된 국제 연맹은 제창국인 미국이 불참하였고, 독일과 소련의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군국주의 세력의 도발에 대한 집단적인 제재 수단이 없었다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반제국주의 운동의 전개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자치권 인정을 약속하며 인도를 전쟁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인도 통치법을 개정한 롤럿법(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인도인을 탄압하자 간디는 완전 자치를 요구하며 비폭력 불복종을 내걸었습니다. 영국이 소금을 전매하고 인도인의 소금 제조를 금지하자, 간디는 소금 행진을 펼치기도 하였고 여기에 많은 인도인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간디의 뒤를 이은 네루는 보다 급진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무력으로 영국 식민 지배에 저항하였습니다. 결국 영국은 신인도 통치법을 제정하여 각 주의 자치를 인정하였습니다(1935). 그러나 군사권과 외교권은 여전히 영국의 인도 총독에게 남아 있어, 반영 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신해혁명 이후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천두슈, 후스 등 지식인들에 의해 잡지 신청년을 중심으로 하여 과학을 통해 중국을 개혁하려는 신문화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파리 강화 회의 결과 제1차 세계 대전 승리의 대가로 중국 내 독일의 각종 기원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자 중국인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에 베이징 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일, 반군벌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5.4 운동, 1919). 이 운동은 학생과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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