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 러시아
러시아에서는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진전되어 공장 노동자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노동 운동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사회주의 사상도 널리 퍼졌지만, 차르를 중심으로 하는 전제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러일 전쟁으로 인한 물가 인상 등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가 분명해진 190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일으키고, 차르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궁궐로 행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위대는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이들에게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습니다(피의 일요일 사건). 이 사건으로 민중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전국적으로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었습니다.
정부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고, 의회(두마)를 설치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토지 개혁과 교육 개혁을 추진하였고, 전제 정치도 자유주의적인 입헌 정치로 차츰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러시아가 연합국 측에 참전하면서 이러한 변화는 중단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발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러시아는 초기부터 패전을 거듭하였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으며, 민중들은 식량 부족 등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러시아 민중들은 마침내 1917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제 정치의 타도와 전쟁 중지를 외치는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봉기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각지의 노동자와 병사 대표들은 소비에트(평의회)를 결성하고 혁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나면서 제정이 무너졌고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2월 혁명).
그러나 멘셰비키가 지원한 임시 정부는 전쟁을 지속하였고, 국내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는 가운데, 스위스에서 귀국한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모을 것과 토지 균분, 전쟁 중지 등을 내세우며 임시 정부를 비판하였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을 준비하던 레닌은 농민과 노동자, 군인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임시 정부를 타도하고 레닌이 주도하는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10월 혁명).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
혁명 정부는 볼셰비키 독재를 실시하였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꾼 볼셰비키는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독일과 단독 강화 조약(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18)을 맺고 전쟁에서 벗어나 산업 시설의 국유화와 토지의 농민 분배 등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내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레닌은 내전을 치르면서 철저한 전시 경제 통제 정책을 실시하여 경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레닌은 농업과 공업 분야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신경제 정책[NEP]을 실시하였습니다. 이후 점차 생산력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사회주의 세계 혁명을 목표로 하여 코민테른을 창설하였으며, 주변의 소비에트 정부를 묶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하였습니다(1922).
레닌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집권한 스탈린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소련의 경제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에게 권력이 집중된 1인 독재 체제가 강화되어 개인의 정치적 자유가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옛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대다수는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했습니다. 한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은 동아시아에 전해져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1920년대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독립을 도모하여 반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한중일 3국에서는 모두 공산당이 조직되었고, 농민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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