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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by mr.silly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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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배경

 19세기 후반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 각국의 식민지 확대 경쟁이 추진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파쇼다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하였고,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충돌 위기를 겪었습니다.

 독일은 통일 이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삼국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는 독일에서 빌헬름 2세가 즉위하면서 추진한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운 팽창 정책에 불안을 느꼈습니다. 이에 러시아,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을 맺었습니다. 이후 유럽은 3국 동맹 측과 3국 협상 측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발칸반도에서는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이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다가 독립한 발칸반도는 민족과 종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심했고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둘러싼 서구 열강 간의 대립이 심하였습니다.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러시아는 슬라브족의 이익과 단합을 추구하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세르비아를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맞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워 대립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가 탐내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버리자,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914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개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이 연쇄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 등이 참전하자, 전쟁은 세계 대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 제국을 주축으로 하는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협상국으로 나뉘어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참전한 미국, 일본 등은 협상국에 가담하였습니다.

 독일은 짧은 시간 내에 승부가 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전방과 후방의 구분 없이 모든 인력과 ㅁ루자를 총동원하는 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세계 59개국 중 33개국이 전쟁에 참여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였습니다. 남자들은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여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무기와 탄약을 생산하거나 식량, 옷 등을 생산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전쟁에 연관되었으며, 전쟁에 필요한 경비를 모으기 위해 일부 국가는 공채를 매매하거나 식민지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

 처음에는 전세가 동맹국 측의 승리로 기울어지는 듯하였으나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이 마른 전투와 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지루한 참호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참호전으로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비, 추위, 해충, 진창, 쥐 등이 병사들을 괴롭혔습니다.

 해상에서는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먼로주의를 내세우며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은 영국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고로 미국인이 다수 사망하면서 미국 내에서 참전 여론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협상국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계속되는 전쟁에서의 패배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정권은 독일과 단독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하였습니다. 협상국 측의 전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독일은 서부 전선에 주력하였으나 같은 동맹국 측 국가들이 차례로 항복하면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 킬 군항에서 일어난 군인들의 반란으로 빌헬름 2세가 망명하였고, 새로 구성된 임시 정부가 협상국측과 휴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총력전으로 불렸던 제1차 세계 대전은 참혹한 결과를 드러냈습니다. 1,000만 명 가까운 희생자와 2,000만 명 이상의 부상자를 낳았습니다. 매일 900여 명의 프랑스군과 1,300여 명의 독일군이 사망했을 정도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대량 생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분당 500발이 발사되는 기관총과 수류탄, 지뢰, 가시철조망 등은 이 전쟁이 '산업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쟁 중 민간인의 희생도 컸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과 전염병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1918년에 독감으로 독일 국민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굶주림과 영양실조가 원인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 피해를 끼친 전쟁이 끝나면서 사람들은 평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전제 국가가 무너지거나 해체되고 공화정이 수립되는 등 정치적 변동이 나타났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후방을 책임지던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증가시켰습니다. 또한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평등에 관한 관심과 요구가 증가하여 영국에서는 전쟁 후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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