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침략한 영국
인도의 무굴 제국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종교적 대립과 지방 세력의 등장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인도의 분열된 시기를 틈타 영국은 값싼 면직물을 인도에 들여와 인도의 면직물 산업을 몰락시켰고 인도 무역을 독점하였습니다. 인도인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향신료를 재배하여 판매하는 등의 방법으로 영국은 막대한 이윤을 챙겼습니다. 프랑스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인도에 진출을 꾀하자 영국은 프랑스를 플라시 전투(1757)에서 물리치고 벵골 지방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등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넓혀갔습니다.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물리친 영국은 마라타 동맹과 마이소르 왕국을 점령한 후 시크교국을 격파함으로써 인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의 경제적 침탈과 착취로 면직물 산업이 붕괴되었고, 면화와 아편, 차 등을 재배하는 영국의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세포이 항쟁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인도를 통치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 인도인 용병(세포이)을 고용하였습니다. 세포이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하급 군인으로 배정되어 상급자인 영국인으로부터 지휘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인도를 지배하는 데 협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창기 세포이들의 대우와 급여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영국인들의 인종적 차별과 횡포로 불만이 쌓여 가던 세포이들은 결국 봉기하였습니다(세포이 항쟁, 1857~1859).
벵골 지방에서 시작된 세포이 항쟁은 많은 인도인이 참여하면서 민족 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시민들과 세포이들은 델리를 점령하고, 바하두루샤 2세를 황제로 옹립하였습니다. 점차 항쟁은 인도의 북부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세포이 항쟁은 영국의 경제적 착취와 차별적인 정책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의 억압을 받던 시크교도들의 협조와 본국의 지원을 받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였습니다.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없애고, 인도 통치 개선법을 마련하였습니다. 아울러 영국은 무굴 제국의 호아제를 폐위하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통치하는 인도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인도를 직접 지배하며 식민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고, 인도 내부의 종교적, 인종적, 계급적 대립을 조장하거나 이를 이용하여 통치하였습니다. 이에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비롯한 많은 인도인들은 영국의 인도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19세기 전반 람 모한 로이를 중심으로 한 힌두교 지도자들은 브라흐마 사마지 운동을 전개하여 인도의 사회적, 종교적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 인도인의 민족의식이 점차 높아지자 영국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인도인들의 정치 조직을 결성하는 일을 지원하였습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인도 국민 회의였습니다(1885). 인도 국민 회의는 초기에는 영국 정부에 협조하면서 인도인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을 활용하여 벵골 지방의 분할(1905)을 꾀하는 정책을 펼치자 반영 운동으로 돌아섰습니다.
영국이 인도의 종교적 대립과 갈등을 조장해 인도의 민족 운동을 약화한다고 생각한 인도 국민 회의의 급진 세력은 콜카타 대회에서 4개 강령-영국 상품 배척, 스와라지(인도인의 자치),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국민 교육 실시-을 채택하여 대규모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영국은 이러한 인도의 민족 운동을 약화하고자 이슬람교도 연맹을 지원하여 또다시 종교적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였으나, 오히려 이슬람교도 연맹은 인도 국민 회의와 함께 반영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결국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취소하고, 형식적이었지만 인도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1911).
이후 인도의 민족 운동은 무력 투쟁으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네루와 비폭력, 불복종 운동으로 인도의 완전한 자치를 주장하는 간디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
프랑스는 인도 진출을 시도하다 영국과의 플라시 전투에서 패한 뒤 인도차이나반도로 침략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를 박해한 것을 빌미로 베트남과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프랑스는 사이공 조약(1862)을 체결해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베트남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청과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갈등을 빚다 1884년 청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청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청으로부터 베트남의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한 발 더 나아가 베트남,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묶어 프랑스력 인도차이나 연방(1887)을 수립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맞서 베트남 황제는 베트남인들에게 프랑스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베트남 황제의 호소에 동참한 전직 관료, 유학자, 학자, 학생 등 많은 살마들이 프랑스에 맞서는 근왕 운동을 추진하였지만, 결국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근왕 운동의 실패 이후 판보이쩌우 등을 비롯하여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베트남 유신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근대적 제도를 배우고자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동유 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판쩌우찐은 근대적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통킹 의숙(1907)을 세워 근대적 교육과 사상을 보급하는 등 프랑스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왕조가 무너지자 이에 자극을 받은 판보이쩌우는 베트남 광복회(1912)를 결성하여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필리핀의 민족주의 운동
필리핀은 16세기 말부터 에스파냐의 식민지였습니다. 이에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와 침탈에 저항하는 필리핀인들의 민족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특히, 지식인층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독립 운동의 중심에는 호세 리살이 있었습니다. 호세 리살은 필리핀 민족 동맹(1892)을 조직하고 에스파냐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35살의 젊은 나이로 처형당하였습니다. 그는 필리핀의 개혁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로 오늘날 필리핀 독립 운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또한, 아기날도, 보니파시오 등은 무장 독립 투쟁 단체인 카티푸난을 결성하여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에 진출하자, 1898년 에스파냐와 미국은 필리핀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에 아기날도를 비롯한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은 전쟁 이후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믿고 미국을 지원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에스파냐가 패하고 미국이 승리하자 필리핀은 의회를 설립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약속을 어기고 필리핀을 공격하여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운동
인도네시아는 오랫동안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았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민족 운동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여성 지식인이었던 카르티니는 여성 교육과 독립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08년 부디우토모를 결성한 인도네시아 지식인들은 근대적 교육과 계몽을 통해 대중들의 국민 의식을 함양하고자 하였습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적당한 교육이 그들의 통치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1909년 부디우토모를 합법적인 조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1901년 부디우토모는 1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조직으로 성장하였지만, 점차 네덜란드에 협조하는 활동으로 대중들의 외면을 받다가 1935년 해체되었습니다.
부디우토모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던 것에 비해 이슬람 동맹은 보다 대중적인 단체로서 인도네시아의 전통을 지키고, 외국 자본의 유입과 크리스트교의 전파를 경계하며 민족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지속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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