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개항
에도 막부는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청이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서 패한 후 강제로 개항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도 막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열강에 대한 에도 막부의 경계심이 높아질 무렵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을 앞세워 도쿄만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개항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굴복한 에도 막부는 미국과 1854년 불평등 조약인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하였습니다. 이어 1858년에도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는 등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질서에 편입되었습니다.
개항 이후 일본 내부에서는 미국에 굴복한 에도 막부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외국 상품의 일본 유입으로 무역 적자가 심화되고, 물가가 오르는 등의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자 하급 무사를 중심으로 하여 외세를 몰아내자는 양이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양이 운동은 점차 외세 배격 운동에서 무능한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왕(천황)을 다시 옹립하자는 존왕양이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존왕양이 운동으로 막부는 무너지고 1868년 일왕 중심의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메이지 유신).
일본의 개혁
1868년 수립된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지방의 다이묘가 다스리던 에도 막부 시대의 번을 폐지하고, 중앙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현을 설치하여(폐번치현) 일원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신분제를 폐지하고 군제를 개편하여 징병제를 실시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일왕에 대해 충성심을 갖게 하고 국가 중심적인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조처로 메이지 정부는 교육 칙어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메이지 정부는 산업 시설을 만들었으며, 서구 열강과 기존에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자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의회를 설립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 민권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결과 1881년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이 창당되었습니다. 자유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우에키 에모리 등은 헌법 제정의 중요성과 참정권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자유 민권 운동을 탄압하고, 독일 헌법을 본떠 1889년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공포된 일본 제국 헌법은 정치, 군사, 외교 등 여러 부분에서 일왕의 지위와 권한을 절대시 하였습니다.
일본의 침략
메이지 정부의 개혁 정책으로 세금 부담이 가중된 농민들과 징병제 실시와 봉건적 특권 상실로 사회적 지위가 떨어진 하급 무사들의 불만이 커져 각지에서 정부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메이지 정부 내에서는 국내의 혼란스러운 위기 상황을 국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고자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일부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메이지 정부는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871년 일본은 청과 청일 수호 조규를 맺어 상호 간에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양국의 영토를 보존한다는 데 합의하였습니다. 이로써 청과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한 메이지 정부는 류큐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타이완을 공격하는 등 대외 침략을 본격화하였습니다.
1876년 조선과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이권과 영향력 행사를 두고 청과 대립하였습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고, 일본은 이를 기회로 청일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은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권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1904년 러일 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1905)을 체결하여,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이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는 등 대외 침략을 노골화하였습니다.
조선의 개항
조선은 19세기에 들어 특정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로 인해 각종 사회 문제가 불거져 민중들의 삶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즉위(1863)로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를 타도하는 한편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에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맞섰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의 침입(병인양요, 1866)과 미국의 침입(신미양요, 1871)을 겪었지만, 조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십 년 간의 섭정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 체제를 수립하면서 종래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내부에서는 점차 문호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통상 개화론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이 대립하였습니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을 개항하고자 하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하여 강제로 개항된 경험을 거울삼아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많은 군함과 병력을 보내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고, 불평등 조약인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 1876)를 체결하였습니다.
조일 수호 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임과 동시에, 3개 항구의 개항, 치외 법권 인정, 조선 연안에 대한 측량권 등을 허용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어서 조선은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을 체결(1876)하는 등 일본의 침략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 이외에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제국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조선
조일 수호 조규를 체결한 고종은 일부 개화 세력을 등용하여 정치 기구를 개편하고 근대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개화 세력 내부에서 개화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임오군란(1882) 이후 개화 정책의 방향, 소극적인 개혁 속도 등에 불만을 품은 급진적 개화 세력에 의한 정변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들은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을 활용하여 정변을 일으켜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변은 오래가지 못하고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갑신정변, 1884).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오래전부터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과 새로이 조선으로 진출을 꾀하던 일본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상인들과 농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마침내 민중들은 1894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적 사회 제도를 타파하자는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반외세, 반봉건을 내세운 동학 농민 운동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좌절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개혁(갑오을미개혁)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일본의 간섭 등으로 그 효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조선에 출병한 청과 일본의 양국 군대는 일본의 도발로 전쟁에 돌입하였습니다(청일 전쟁, 1894).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노골화하고, 경제 침탈을 심화하는 등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본격화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삼국 간섭 이후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일본은 러시아에 우호적이었던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을미사변 직후 일본의 간섭으로 시행된 을미개혁 중 단발령의 시행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하여 전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습니다.
조선의 의병 항쟁은 계속되었습니다. 1905년 일본이 불법적인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고종을 1907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여 끈질기게 일본에 대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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